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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견고한 무늬를 이룰 때까지

by phobbi posted Mar 04, 2025 Views 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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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3-04

2025. 03. 04.

 

깃털처럼 가벼워서 그림자조차 증발해 버린 교수의 종류를 몇으로 나누어서 짧은 희롱이나 해볼까.(내 스스로 교수의 일원이니 그럴 자격이 오히려 있지 않은가.) 그 중의 첫째가 단연 기생충이다. 기생이란 말 그대로 숙주에 붙어 사는 꼴인데, 자신의 발로 땅을 밟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남의 몸에 붙어 있으려니 당연히 가벼울 수밖에 없다. 무거움은 그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만의 스타일과 그 스타일이 견고한 무늬를 이룰 때까지의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생충의 본질은 자생력이 없다. 자생력이 없으면서도 이름치레와 체면치레를 하자니 당연히 허위 의식만 늘어간다.

 

결국 선생이란 자신의 말, 그리고 그 말이 흘러 이루는 자신의 길이 있는 사람이니, 우선 자신의 말과 길을 계발하려는 고민 속에서 선생의 무게가 생기는 법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스스로의 음성과 스타일, 그리고 생각의 역사가 온축된 입장을 얻는 데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소피스트를 찍어 붙였던 이름 영혼의 장사꾼’, 혹은 해방 이후 대다수 교수의 지배적인 모습일 수밖에 없었던 지식 중계상의 신세를 벗어나려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노력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길러나가는 결기와 행태가 먼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입장의 다름을, 그리고 그 다름의 깊이를, 그리고 마침내 그 깊이의 역사를 계발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김영민, <문화, 문화, 문화 : 산문으로 만드는 무늬의 이력>, (동녘, 1998, 12, 20.) 18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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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나도 여기저기서 선생으로 불리는 일들이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선생이 되지 말라시던 주님 예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김영민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증발해 버리는 교수들을

기생충’, ‘조로(早老)한 고양이의 하품’, ‘닭 쳐다보는 소로 비유한다.

기생충은 운 좋게 종신 교수직을 허락받았으나,

대학 동네에 빌붙어 영혼을 판매하며 지식 중계상으로 밥벌이를 하는 이들이다.

하품하는 조로(早老)한 고양이들은 어떤 도전도 없이,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나 도전, 열정도 없이, 점잖게 무능하면서도, 무능하면서도 점잖게 권위에 기대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학교에 꿋꿋하게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이다.

닭 쳐다보는 소는 삶의 현장과는 유리된 채, 한때 배웠던 이론의 공허한 수레바퀴만을 돌리는 이들이다. 정보를 수집하여 배포하는 전문 기능인일 뿐 지식인의 범주 근처에는 가볼 수도 없는 이들이다.

 

저자는 이들 모두를 쓰레기라고 부른다.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은 발견하기 어려워도,

쓰레기는 쉽게 가려낼 수 있다고 한다.

쓰레기는 필경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쓰레기 냄새가 나지 않으려면

견고한 무늬를 이룰 때까지

스스로 법고창신의 세월과

책임질 수 있는 입장을 지닐 때까지

견디는 결기와 행태가 필요할 것이다.

다름의 깊이는 묵히고 삭히는 시간 없이 될 수는 없다.

 

- 향린 목회 121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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