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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청각과 시각의 근원적 지향의 차이

by phobbi posted Mar 05, 2025 Views 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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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3-05

2025. 03. 05.

 

성서에서 주()는 족장들이나 예언자들에게 거듭 현전한다. 그러나 그 현전은 거의 항상 들리지만 보이지는 않는다는 양태를 취한다. 그들에게 현전하는 것은 주의 말씀이지, ‘모습은 아니다. 사람에게 신의 모습은 결코 직접적으로 시각적으로 현전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사람은 나의 얼굴을 보고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출애굽기3320.)

 

나타남의 양태는 무지개이며, ‘구름이며, ‘환영 속이며, ‘꿈속이며, ‘하늘의 천사를 매개로이며, 혹은 야곱처럼 밤의 어둠 속에서이다. 모세에게 임재할 때 신은 불타는 섶에서 말을 거는데, ‘모세는 신을 우러러보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숨겼’(출애굽기36), 요나는 신의 얼굴을 피해 달아났으며, 에제키엘은 주의 영광을 보고 엎드렸고, 엘리야는 주의 음성을 듣자 곧바로 외투로 얼굴을 덮었다.’

 

유대의 백성은 신을 보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신의 상을 만드는 것도 금지되고 있다. 신이 모세에게 그대는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을 주었기 때문이다.

 

신을 표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위해우상을 만든다는 것은 시각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를 질서지우는 것이다. 초월자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으로 왜소화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유대교가 금기로 삼은 것이다.

 

신을 시각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이토록 엄한 금기가 되는 데 비해, 신을 청각적으로 표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훨씬 더 관용적이다. ‘주의 이름인 테트라그람(tetragram, 네글자 말, YHWH)을 유대교에서는 아도나이(Adonai)’, ‘엘로힘(Elohim)’, ‘하쉠(Hashem)’과 같은 비성음(非聖音)으로 바꾸어 말해, 신을 직접 지칭하는 것을 삼간다. 그러나 테트라그람은 제2신전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해마다 한 번 대속죄일에 신전 안에서 대제사장에 의해서만, 조건부로 똑바로 발성되고 있었다.

 

신의 모습을 조형적으로 본뜨는 것은 신의 타자성을 크게 손상시킬 것이다. 그러나 신을 향해 그 이름으로 말거는 일은 신이라는 말이 의미할 절대성을 훼손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이름은 신에 대해서말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을 향해서(à-Dieu)’ 말걸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음성은 무한의 타자성을 향해 열리고, 표상은 타자를 하나의 전체성 안에 가둔다. 음성은 무한을 향해 확장되고, 표상은 전체성에 수렴된다. 유대교적 사고는 그러한 청각/시각의 근원적인 지향적 차이를 날카롭게 자각한다.

 

우치다 타츠루 지음/이수정 옮김,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갈라파고스, 2013. 12. 23.), 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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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교만하다.

제가 보고 싶은 대로 보다가,

보기 싫으면 감아 버린다.

 

귀는 겸손하다.

사방에서 들리는 온갖 소리를

무던히 견뎌내며 듣는다.

 

자기중심적인 교만한 눈으로 세계를 질서 지우려고 하기보다,

타자를 향해 열린 겸손한 귀로 무한을 향해 넓혀가야 한다.

 

신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들음에서 오는 것이고,

사람에 대한 신뢰도 잘 듣는 것에서 쌓이는 것이다.

 

 

 

 

- 향린 목회 12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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