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3. 09.
겟세마니 동산은 어느 면에서 보면 십자가보다 더 어둡고 위험한 곳이다. 겟세마니 동산은 내적 고뇌, 나의 의지와 신의 의지와의 씨름, 상상과 현실 간의 협상을 상징한다. 게다가 이 고뇌가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신의 의지를 무조건 따르는 복종의 문제가 아닌,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수용과 소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투쟁이 예수 혼자만의 것이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는 현실을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는 예수의 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더욱더 실감하게 된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이 고뇌만큼은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줄 수 없다.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자, 우리 스스로를 버려야 하는 일이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려 해도 먼저 이 고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야고보의 다리를 절룩이게 하고(창세기 32:23-33), 예수에게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게 했던 것도 바로 이 고뇌다. 신의 의지와의 투쟁에서 비롯된 고뇌이며 동시에 모든 용서에 따르는 고뇌다.
스티븐 체리 지음/송연수 옮김, <용서라는 고통>(황소자리, 2013. 6. 24.), 18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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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제자는 졸았고,
예수는 근심에 싸여 매우 괴로워하셨던 그날 밤의 사건!
예수는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많은 목사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에 주목하고,
그것에 더 집중하면서 예수처럼 살라고 너무나도 쉽게 설교할지 모르겠지만,
예수가 그렇게 말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고뇌에 더 천착해야 한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변하는 이들의 상당수는
실제로는 자기 뜻을 말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실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뜻을 수용하고 내 것으로 삼는 것은
누가가 말한 대로 땀이 피처럼 흘러야 하는 것(눅 22:44)일지 모른다.
저자인 스티븐 체리 신부님은 바로 ‘용서’가 이런 고뇌와 맞먹는 것이라 말한다.
그렇다. 아마도 용서는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데리다가 말한 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만이 진정한 용서이고,
그와 같은 “순수한” 용서는 “미친 짓”일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런 미친 짓에 도전했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도 도전하고 있기에 세계 보편 종교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 향린 목회 126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