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3. 11.
베드로는 이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5-16). 내가 같은 말을 여전히 사용할 수 있을까? 그 말은 얼마나 융통성이 있는 것일까? 얼마나 새로운 의미를 향하여 개방된 것인가? 만일 이 말들이 유신론적 과거 속에,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의미 속에 감금되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옆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다.
이 말들을 그 과거로부터 잡아 떼어 내어 그것을 새로운 의미를 향하여 열어 젖히는 것은 정직한 일인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말은 변한다. 현실인식과 심지어 하나님 인식조차도 변한다. 설명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진리를 왜곡한다. 그러므로 내가 대답해야만 하는 진짜 문제는 어제의 패턴을 초월하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 체험을 확언할 수 있고 세상의 독자들을 초청하여 그 체험을 확언하게 하는 말로 이 예수의 핵심 요체를 파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맞대놓고 솔직히 말해서, 유신론은 내가 더 이상 경의를 표할 수 없는 개념인데도 이 예수는 나에게 하나님 체험일 수 있는가? 그분은 여전히 내게 거룩함으로 진입할 출입구이고 그 거룩함에 대한 표현일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솔직히 말해서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참된 기독교 개혁인지 아닌지, 또는 내가 착각하여 나의 억압된 두려움 가운데 기독교의 죽음으로부터 숨으려 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덮어 숨기려 하려는 것이나 아닌지를 결정지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이 장을 시작함에 위험부담이 매우 크다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유신론이 죽었다면, 그래도 경배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무릎을 꿇게 할 만큼 예수의 이름이 신자들 귀에 다정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더 이상 유신론적 신의 문자적인 성육신으로, 혹은 문자적인 삼위일체 신의 제2위(二位)로 보는 예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면, 우리가 그에 관하여 실재적(real)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은 여전히 이 전통적인 기독교 주장 저변에 깔린 체험과 예수를 연결해 주는가? 바울이 무아경에서 외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 한 말에 우리도 동참하게 해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언어는 무엇인가?
내가 기독교 과거의 유신론적 사상의 틀을 떠나서 이 예수의 생애를 탐구하기 시작할 때, 전혀 새로운 전망이 대두됨으로써 나는 힘을 얻고, 심지어 매혹당하기까지 한다.
존 쉘비 스퐁 지음/최종수 옮김, <새 시대를 위한 새 기독교>(한국기독교연구소, 2005. 9. 20) 17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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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세상에서 과거의 언어에 묶인 예수 초상이나 초자연적 유신론의 언어는
이미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전혀 설득력이 없는 언어를 붙들고 있기에 매우 심한 왜곡이 일어나고,
세상과 전혀 소통할 수 없는 외계어 같은 방식의 언어들만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맥을 못 추는 한국 개신교의 현실이다.
오랜 전통에서 미래의 지혜를 길어 올리려면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파고 파야 한다.
21일부터 진행되는 “예수와 공자” 강의를 통해
참여하는 분들과 이런 작업들을 해 보고 싶다.
- 향린 목회 128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