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3. 14.
우리가 예수의 핵심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면, ~~ 우리는 보충이나 수정을 요구하지 않고, 현재의 삶과 사랑을 그저 긍정하는 데에 만족하게 된다. 우리는 절대로 다른 누군가가 몰락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지 않게 된다. 또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다.
당대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나라가 왔고, 그 나라를 선택하는 자 모두를 위한 것이니,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라!
내가 설명한 예수 종교(Jesus’ religion)의 흥미롭지만 거의 언급되지 않는 특징 중 하나는 불합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 종교(church-religion)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신조(creeds)”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는 경우에도, 더 나아가 명백히 참이 아닌 경우에도 신자들에게 믿음(beliefs)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예수 종교는 그저 윤리적인 결단으로 부르는 것이다. 예수 종교는 우리가 삶과 동료 인간을 향한 타오르는 사랑에 온 맘으로 우리 자신을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근심이나 박해 같은 것들은 무시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종교는 “인지하는 것이 아니다(non-cognition).” 예수 종교는 실제로는 초자연적인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 종교는 우리가 지금 삶에서 권위에 복종하는 대가로 죽음 이후 다른 세상의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참된 종교에, 또는 적어도 명백하게 거짓이 아닌 종교에, 관심을 기울일 만한 인간이 분명 조금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니체(Nietzsche)는 기독교인이 단 한 명 있었고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고 말한다. 내 생각에 이 말은 예수의 끔찍하고 비참한 죽음이 (예수 이후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 용기를 상실하도록 만들었다는 뜻이다. 윤리적인 비전의 충만함도 곧 잊혀졌다.
돈 큐핏 지음/안재형 옮김, <문명의 위기와 기독교의 새로운 대서사>(한국기독교연구소, 2020. 7. 15.) 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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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다시 되살아 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가 자기 삶과 가르침에서 보여 주었던 윤리적 비전의 그 생생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는 믿음으로만은 절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입에 발린 믿음 고백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성을 확보한 행함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행함 속에서 작동하는 믿음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는 그 내면의 진실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돈 큐핏이 말하는 대로
예수 종교는 과거의 영광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미래의 보상을 탐닉하지도 않는다.
예수의 종교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을 잊고 삶과 이웃을 위한 타오르는 사랑을 정의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 향린 목회 131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