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방법으로 ‘모(模)·임(臨)·방(倣)’이라는 것이 있다. 우선, 가장 단순한 방법인 ‘모’는 본래의 그림(原本) 위에 종이나 비단을 겹쳐 놓고 아래쪽에서 비쳐 올라온 형상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이다. 이는 서화를 처음 배울 때 기존의 필법을 익히기 위한 기본적인 훈련 방법의 하나이자 오늘날과 같이 인쇄술이 발전하기 이전까지 원본을 복제하는 데 주로 활용되었던 방법이다.
‘임’은 원본을 옆에 놓고 그대로 본떠 그리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형상은 닮지만 크기는 달라질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선인의 표현 기법에 대한 이해와 학습은 물론 때로는 본인의 개성을 적당히 섞어 넣을 수도 있다. 특히 필법과 묵색의 변화가 많은 산수, 화조 및 서예를 학습하는 데 많이 활용되었다.
‘방’은 단순히 그림의 형상만이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작풍은 물론 정신까지 표현해내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그린 것을 방작(倣作)이라 하는데 비교적 수준이 높아 모와 임을 충실히 소화해 낸 후라야 가능하다. 방작은 단순한 ‘따라 그리기’의 차원이 아니라 창작에 준할 만치 색다른 변화를 구사할 수 있어 원작을 추정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화가이자 서예가인 동기창(董其昌)은 적절한 변화가 없는 작품이라면 쓸모없는 쓰레기와 같다고 했는데, 방작은 반드시 원작과는 다른 개성이나 변화가 가미되어야 한다. 흔히 사용되는 ‘모방’이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박현택, <박물관에서 · 서성이다>,(통나무, 2023. 12. 10.), 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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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것이란 없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새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던 것, 우리보다 앞서 있던 것이다.” (1:9-10)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요청되고 있다.
특별히 상상력과 창의성이 더 주목받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창조적 사유 능력을 갖기를 원한다.
뭔가 이전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전적인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길 자못 기대한다.
그러나 탄탄한 새로움은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
서 말의 구슬을 차근히 꿰어내는 온고(溫故)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모·임·방에 대한 박현택 선생님의 설명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그린 것을 방작(倣作)이라 하는데,
비교적 수준이 높아 모와 임을 충실히 소화해 낸 후라야 가능하다.”
진짜 공부는 선생이 하시는 말씀을 진지하게 따르는 충실함에서부터 비롯되는데,
헛똑똑이들은 너무 쉽게 선생으로부터 배우는 과정을 무시하곤 한다.
소화하지 못한 채 들은 것을 뱉어 놓고 잰체하거나(道聽而塗說, <論語> 陽貨 14.)
반짝 떠오르는 한 줌의 실마리를 가지고 으쓱하며 떠벌이곤 한다.(思而不學, <論語> 爲政 15)
공부 좀 한다는 동네에서도 대화를 나누기 꺼려지는 부류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삭히는 시간일 것이다.
- 향린 목회 44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