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7.
신의 본성의 이와 같은 작용하는 성장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 – 그것은 한갓 이미지에 지나지 않지만 – 는, 그 어떤 것도 상실되지 않도록 하려는 애정어린 배려의 이미지다.
~~~ 신의 역할은 산출력과 산출력의 투쟁도 아니고, 파괴력과 파괴력의 투쟁도 아니다. 신의 역할은 그의 개념적 조화의 압도적 합리성이 그의 인내 속에서 행사되는 데 있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지 않는다. 신은 세계를 구제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신은 진·선·미에 관한 자신의 비전에 의해 세계를 이끌어가는 애정어린 인내심을 갖고 있는, 세계의 시인이다.
A. N. 화이트헤드 지음 /오영환 옮김, <과정과 실재 : 유기체적 세계관의 구상>, (민음사, 1994, 3. 25, 1판 4쇄), 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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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화이트헤드가 들려준 말을 한다.
아직까지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상실되지 않도록 하려는 애정어린 배려의 이미지”
이 말을 성경에 빗대어 풀자면,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시다.(사 42:3, 마 12:20) 하나님 안에서는 그 어떤 악도,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엄청난 고통과 쓰라림도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창 50:20),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롬 8:28)이시다.
인간은 생명의 유한성 속에서 좋은 것은 가까이하고 밉고 싫어하는 것은 멀리한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애정 어린 인내심을 가지고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품어 안으신다. 하나님에게 버려지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간직하신다.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도, 즐거움뿐만 아니라 고통도,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도, 승리뿐만 아니라 패배도, 선뿐만 아니라 악도. 바로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
우리가 일구려는 정의의 행진은 바로 이러한 애정 어린 배려와 인내심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창조가 아니며(창조는 곧 파괴이므로), 세계와 우리 자신, 곧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구제이기 때문이다.
- 향린 목회 34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