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
대체로 믿는 것은 쉽고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또 아는 것을 긴 걸음으로 옮겨 실효를 내는 일은 더 어렵다.
부처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해탈한다거나 신(神)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복락을 누리겠다는 식의 발심은 오롯이 존재의 전체를 향하는 ‘전체 구원’의 열망에 이른다. 이는, 인류에게 알려진 지식과 경험을 현명하게 배치하고 융통해서 최선의 판단과 전망 아래 책임 있는 삶의 방식을 구하려는 ‘부분 구원’과 다르다. 전체 구원의 체계는 늘 ‘아는 체’ 해야 하지만, 부분 구원의 길은 차라리 ‘어리눅은 체’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전체성의 열망은, 그 모든 열망이 그러하듯이 무지(無知)에 터한 채로 행복과 안락, 심지어 죽음의 해결을 꾀한다. ~~~ 지구상, 역사상 그 모든 종교가 선전하고 있는 전체 구원의 기획은 과욕이다. 그것이 과욕인 이유는 값싸게 얻고자 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무지에 터하기 때문이고, 게다가 그곳은 좁은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쏠려서 믿고, (남에게) 맡겨서 믿고, 밑져야 본전이니 믿곤 하는 것이다.
‘전체성은 비진리 Das Ganze ist das unwahre’(아도르노)라는 지적처럼, ‘서양 철학과 사상은 어디서나 전체성의 향수(鄕愁)를 지니’(레비나스)면서 진리를 독점하고 전매한다. 당연히 이 전체성의 향수는 종교에서 그 극치를 보인다. 이 종교들은 모조리 아는 체하고 온전히 구원할 수 있는 체한다. 교리가 사이비화될수록 구원을 향한 강도만 높아진다. ~~~ 종교들은 대체로 ‘몽땅 세일’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 대중이 세일에 쏠리는 것처럼 신자들도 세일에 몰린다. 그러나 믿음과 깨침이라는 자의적 심리 도식에 의한 ‘세일’주의적 종교는 ‘악평등’의 모순을 결코 피할 수 없다.
반면 공부길이 희망하는 구제에는 세일이 없다. 대리(代理)도 연좌(連坐)도 없어, 오직 개인의 실존적 개별성이 한 걸음 한 걸음 제 몸으로 온전히 나아가면서 스스로 얻어내야 한다.
김영민, <조각난 지혜로 세상을 마주하다>(글항아리, 2024. 9. 13.) 57-59.
==============================================
성숙한 신앙은
제 스스로 주어진 삶 안에서 끊임없이 다름을 체험하고 녹여내는 일일 것이다.
‘묻지마 믿음’에서 ‘이해되는 신앙’으로 나아가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발로 내려가는 머나먼 길 위에서
전체 구원의 기획이란 과욕이 맞지만,
깊이 생각하는 좁은 길을 택하면서 값비싼 몸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혹시 부분 구원을 추동하는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모름을 굳게 간직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제 몸으로 천천히 걸어가 보자.
- 향린 목회 28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