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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믿음과 앎의 상호 작용

by phobbi posted Dec 18, 2024 View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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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11-30

2024. 11. 30.

 

조신(祖信)과 교신(敎信)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예가 육조단경에 나오는 두 게송이다. 하나는 신수가 지었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혜능이 지었다고 하는데, 북종선의 점오 사상과 남종선의 돈오 사상을 대비시킬 때면 이 두 게송이 등장한다. 신수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몸은 지혜의 나무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心如明鏡臺)

언제나 부지런히 닦아 내서(時時勸拂拭)

먼지가 앉지 않게 할지라.(勿使惹塵埃)

 

한편, 혜능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지혜의 나무라는 게 워낙 없고,(菩提本無樹)

거울이라는 것도 원래 없으며,(明鏡亦非臺)

불성은 언제나 깨끗한 그대로인데,(佛性常淸淨, 또는 本來無一物)

먼지 낄 데가 어디 있단 말인가?(何處惹塵埃)

 

신수가 지었다는 게송은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신을 반영하는 반면에, 혜능이 지었다고 하는 게송은 나는 부처이다라는 조신을 반영하고 있다.

 

박성배 지음/윤원철 옮김, <박성배 교수의 불교 철학 강의: 깨침과 깨달음>(예문서원, 2002. 12. 10.)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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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믿는가?”에 대해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도교는 인격적이면서도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실재를 상정하는 반면,

불교는 영원불변의 신성 개념 자체가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인연생기(因緣生起)를 믿을 뿐이다.

 

그러나 어떻게 믿는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통하는 바가 크다.

믿음에는 반드시 앎이 작용한다. 앎만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름도 작용한다.

앎만 작용하면 앎뿐이다. 그런데 앎이 없으면 믿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알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존재할 때 믿음이 필요하고, 믿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과 이해의 상호 작용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해함으로써 믿게 된다는 말이나, 예언자의 말씀에 따라 이해하려면 믿어라고 하는 나의 말이나 모두 다 옳다. 둘 다 참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해해야 믿을 수 있고, 또한 믿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박성배, 같은 책, 72.)

 

지눌 또한 믿음과 이해가 서로 뗄 수 없다고 말한다.

 

올바른 믿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이해가 따라야 한다. 영명연수(永明延壽)가 말하기를, “이해가 없는 믿음은 무명만 더할 뿐이고 믿음이 없는 이해는 그릇된 견해만 더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믿음과 이해가 함께 해야만 도에 들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박성배, 같은 책, 73. 卽生正信, 須要解滋, 永明云, 信而不解, 增長無明, 解而不信, 增長邪見, 故知信解相兼, 得入道矣. 知訥<眞心直說>)

 

신수의 게송이 점수(漸修), 혜능의 게송이 돈오(頓悟)를 드러낸다면

그리스도교의 성화(聖化)와 칭의(稱義) 또한 이와 맥이 닿는다.

중세 안셀무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의 번쇄한 논의가 신을 이해하려는 교신(敎信)의 노력이라면, 슐라이어마허의 절대 의존의 감정이나 루돌프 오토의 거룩함의 체험으로써의 신앙은 조신(祖信)에 해당할 것이다.

 

깨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고 느닷없이 얻게 되는 깨달음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

 

- 향린 목회 27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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