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6.
삶의 종교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우리의 문화가 특히 지난 4~500년 동안 발전시켜왔던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에 몰입하도록 만들었으며, 기존의 객관적 실재를 모두 상실하도록, 높은 수준의 의식에 도달하도록, 우리 자신의 공통의 인간 세상과 공통의 가치를 창조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왔다는 것이다. 삶의 종교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와 같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비전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시도이다. 우리는 이제 군인보다는 예술가에 가깝다. 우리는 창조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과거 유형의 종교에서 우리는 삶을 순례(pilgrimage)로 보았고, 마치 방랑하는 철학자나 선교사나 군인처럼 규칙의 지배를 받는 훈련된 순회자의 삶(itinerant life)을 살았다. 행복은 우리가 추구하는 죽음 이후에나 오는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삶의 종교에서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훨씬 더 안정된 삶을 살지만, 과거 시대 사람들이 도무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회의주의(skepticism)와 허무주의(nihilism)를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활용해야 한다. 삶은 어려운 일이다. 재협상, 타협, 재평가가 계속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보다 좀 더 열심히 살 수 있고 즐길 수 있다. 왜냐고? 우리에게 삶에 대해 의심하고 삶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라고 가르쳤던 이전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들이 모두 죽고 난 지금, 우리는 삶이 숨 쉬는 것보다 더 우리에게 가까우며 손발보다 더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삶은 우리이고, 삶은 이 모든 것, 현재이다.
돈 큐핏 지음/안재형 옮김, <우리 위에는 하늘뿐: 일상생활의 종교>(2022. 12. 30.)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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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서 현대인들의 종교성을 표현하면서 흔히들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이라고 한다. 영성을 추구하지만 제도 종교에는 소속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BWB라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believing without belonging의 약자로 한국에서는 흔히 '가나안 성도'라고 불린다.
17세기 자연과학이 만개한 이후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초자연적 실체로서의 형이상학적 신의 존재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서구에서 종교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돈 큐핏은 고민하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다.
현재의 고통스런 삶을 내세에 대한 희망으로 견디기보다는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과감하게 매 순간 자신의 삶을 직조하는 예술가의 삶을 살라고 하면서, 태양처럼 살아가고(Solar livilng), 태양처럼 사랑하라(Solar loving)고 조언한다.
돈 큐핏의 제안은 삶에 대한 무한 긍정과 생명력의 초인적 창출을 기대했던 니체의 기독교적 버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포이어바흐부터 시작해서 프로이트, 맑스, 니체에 이르는 전통적 서구종교에 대한 비판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에서 돈 큐핏의 저작들은 읽어볼 만하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의 대안이 대체적으로 역시 서구 개인주의의 범위 내에서 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에 대한 부분이 약하다. 그럼에도 죽음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를 일구려는 그의 도전은 우리의 현실을 보다 정직하게 보면서 더 나은 삶을 창조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 조언한다.
"종교적 정화가 시급하다. ~~ 종교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종교적인 내용 중에서 실체가 없거나 문제가 있는 것들을 모두 비판하고 추방할 필요가 있다. ~~ 아무 도움 없이 자전거 타는 법을 막 배운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삶을 신뢰하는 기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존재의 텅 빈 흐름 속으로 뛰어들어 그 안에서 흘러갈 수 있다. 우리는 삶이 지속되는 동안 삶을 신뢰하는 법, 삶을 사랑하는 법, 삶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같은 책 182.)
- 향린 목회 23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