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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윤리를 넘어서

by phobbi posted Dec 18, 2024 Views 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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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11-23

2024. 11. 23.

 

윤리에서 보는 악은 앞에서 본 대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1) 악은 자유의 산물이다. (2) 악은 준칙과 법의 관계의 역전이다. (3) 악은 자유를 자유롭게 다루지 못하는 알지 못할 자유의 체질이다. 이것으로서 윤리는 할 말을 다했다.

 

이제 종교는 악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약속과 희망 안에 있다. 그 이야기는 먼저 악을 하느님 <앞에> 세운다. <당신께만 오직 당신께만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눈앞에서 나는 악한 짓을 저질렀습니다.>(시편 514). 도덕적 고백을 죄의 고백으로 바꾸는 이 기도는 먼저 악을 더 깊이 의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그리스도교를 도덕화하는 환상이 있다. 하느님 앞에서 악은 약속의 운동 속으로 들어간다. 기도는 이미 관계 회복의 시작이고 재창조의 시작이다. <가능을 향한 열정>이 이미 악의 고백을 사로잡았다. 회개한다는 것은 미래를 향한 것이고, 과거에 대한 회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에서는 악의 내용을 크게 바꾼다. 도덕에서 말하는 악은 기본적으로 범함이요 규범을 위반하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들이 죄를 생각할 때 대개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서면 악의 질이 바뀐다. 악이란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인 체하는 것이 악이다. 율법에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이 악이요, 악이 아닌 것처럼 은폐하는 만큼 가장 큰 악은 없다. 스스로 의로움을 말하지만 그것은 불의보다 더 나쁘다. 윤리 의식은 그것을 모른다. 종교 의식만이 그것을 안다.

 

폴 리쾨르/양명수 옮김, <해석의 갈등>(2001. 1. 5.) 476-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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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는 희망과 자유와 악을 다루면서 칸트와 몰트만을 호출한다. 칸트가 말하는 윤리적인 악이 지니는 한계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몰트만에게서 찾는다. 악을 하나님 앞에 세운다는 관점에서는 키르케고어도 소환되고 있다.

 

윤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악은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로 인해 발생한다. 즉 규범과 법을 지킬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악은 바로 이런 자유가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처럼 악도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인식은 모름을 아는 것에서 멈추기에, 모름의 모름에 대해서는 깨닫지도 못하기에, 자유의지의 선택은 언제나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악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의도된 악도 너무 많이 벌어지지만.

 

근본악을 해소할 방법이 윤리에서는 쉽지가 않다. 유가에서는 규범을 어기지 않도록 철저한 자기수행을 통한 훈련을 말한다. 그래서 공자는 70이 되었을 때 자기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술회하고, 유가 전통은 그를 만세사표로 여긴다. 그러나 자율적 의지가 규범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상대적 세계 속에서 정해지는 규범도 모든 이에게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칸트가 말한 보편적 원칙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상일 뿐 수시로 들락날락 하면서 바뀌는 감정과 복잡한 삶의 관계에서는 도통 통할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이미 저질러진 악을 해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신을 말하는 종교는 자유의지가 지니는 한계를 하나님과의 약속 안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려 한다. 죄를 덜 짓는 인간으로의 변화와 과거의 회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의 추동을 도모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이미 벌어진 잘못으로 인해 생긴 직접간접적 피해자에 대한 책임 있는 행동 없이 신과의 관계 안에서만 해결하려 들고, 또 해결했다고 생각할 때는 가증스러운 일이 벌어지지만, 악을 신의 약속 안으로 가져오는 것은 윤리와는 다른 희망을 보여준다.

 

윤리적 잣대로 사법적 심판을 하는 것은, 정의를 이룬다는 명목하에 결국 고통을 증가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신의 약속 안에서 죄의 용서와 갱생을 도모하려는 종교의 시도는 고통을 감소시킬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특히 악을 하느님 앞에 세우는 존재는 겸손한 인간, 인간의 유한성을 깊이 자각하는 인간을 형성하게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윤리적 악의 관점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리쾨르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인 체하는 것이 악이다. 율법에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이 악이요, 악이 아닌 것처럼 은폐하는 만큼 가장 큰 악은 없다. 스스로 의로움을 말하지만 그것은 불의보다 더 나쁘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의 은총과 은혜 아래에 산다는 것을 잊고, 율법적이고 윤리적인 악의 개념 안에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있는가? 모든 정죄는 바로 종교적 태도가 아닌 윤리적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악을 하나님 앞에 세우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혐오와 정죄를 남발하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악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자는 언제나 용서와 수용을 먼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진지하게 기도하려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억울한 일, 자신에게 가해를 한 그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을 지녀보도록 정말로 치열한 내적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종교의 길은 참으로 좁고 험하다.

 

 

 

 

- 향린 목회 20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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