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7.
종교언어는 고백의 언어입니다. 그것은 자기 경험의 발언입니다. 사실 그러한 언어는 인식 이전입니다. 그러한 고백이 진술하고 있는 어떤 사실이 참인지 참이 아닌지 하는 것은 그 언어 자체만으로는 판단할 길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고백의 언어가 발언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증이 불가능합니다. ~~~ 흔히 이야기하는 '객관적인 실재'와 고백의 언어는 상관이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경험들을 다듬어 발언하는 신학의 언어도 고백의 언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인식의 언어'라는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언어는 실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공감과 감정이입을 통한 참여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봉헌이나 수용을 통해 실재하는 언어 또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만 소통 가능한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신을 강화할 뿐입니다. 신학의 진술이 기본적으로 동어반복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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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언어가 의도하는 것은 '돈독한 신앙'입니다.
문제는 신학언어가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달리 바뀌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학이 흥미롭게 관찰하고 주목하는 것은 신학언어가 스스로 자신의 언어가 고백의 언어임을 알면서도 그 언어를 인식의 언어로 환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그런데 이렇듯 고백의 언어가 인식의 언어이기를 자처하게 되면 그 언어는 이른바 '다른 언어'를 용인하지 못합니다. 옳은 인식을 전유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고, 자기 이외의 어떤 것도 옳지 않은 인식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정진홍 지음, <경험과 기억>(당대, 2003. 2. 15.) 271-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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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의 눈에서 신학 언어를 비평하는 내용이다.
성숙한 신앙과 신학의 발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학문의 대화를 통해 자기 성찰을 하는 것이다. 타자라는 거울이 없다면 자기 도취와 자기 기만에 빠지기 때문이다.
정진홍 선생님은 신학의 언어가 '고백의 언어'라는 특징을 지니는데,
그것을 '인식의 언어'로 착각하고 고집할 때 배타적인 정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잘 말씀해 주신다.
같은 책에서 정 선생님은 고백 언어가 지니는 양지와 음지 모두를 말하는데, 고백 언어는 절대적이고 순수하기에 강력한 힘을 지닌다는 장점을 갖는 동시에 지극히 자의적이며 사투리라 소통 불가한 배타적 문자적 언어가 되고 마는 단점도 갖는다고 말씀하신다.(254-259)
고백 언어가 지니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백이 나오게 된 삶의 현실에 대한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고백은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경험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고,
그래서 경험은 나와 세상과의 만남인데,
세상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고백이 개념으로 바뀌어 경직된 교리로 고착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상상력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변화하는 현실과 맞대면 하면서,
성장하고 바뀌어가는 나를 되돌아 보면서 신학의 언어와 고백의 언어를 재구성해야 한다.
- 향린 목회 14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