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4.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닷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는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 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신경림 외 지음,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창비, 2024. 3. 29.) 34-35.
==============================================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뒤늦게 신학을 전공하게 된 나는 조금씩 공부의 맛을 알아가고 있었다.
기말 보고서를 냈는데 교수가 자기 방으로 오라고 했다.
갔더니, 제법 글을 잘 썼다며 칭찬을 한다.
그리고 물었다.
“아버지가 목회하시나?”
“아닙니다.”
“그럼 아버지가 혹시 교회 장로이신가?”
“아닙니다. 저희 부모님은 모두 비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군. 그럼 혹시 자네를 밀어줄 분이 계신가?”
“없는데요.”
교수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니 열심히 기도해 보자!”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그 방을 나왔다.
열정 어린 마음으로 후배들을 가르치던 그분은,
어쩌면 좋은 마음으로 하신 말일 수 있겠으나,
기분이 참 묘했다.
‘나를 밀어줄 분은 누구인가?’
송경동 시인의 말처럼
나를 날마다 흔들리게 하는 꽃잎 하나,
푸르른 나무와 사정없이 불어오는 시대의 바람,
무너진 담벼락에서 울부짖는 호소,
말없이 그러나 끊임없이 흘러가는 저 강물이 나를 밀어준다.
- 향린 목회 51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