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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주체적 신앙의 발자취 ㅣ 김지목 ㅣ 2025-02-16

by 김지목 posted Feb 16, 2025 Views 2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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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2-16

하늘뜻펴기 20250216 주현절6

주체적 신앙의 발자취

61:1-6a, 98:1-7, 10:34-48, 8:4-10

우리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관계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단독자로 존재할 수 없고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극히 의존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 곧 타자와의 관계를 고려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입니다.

숙명을 안고 태어난 우리는 다른 존재와 관계하면서 문화를 형성합니다. 우리는 문화 안에서 태어났고, 문화를 통해 삶을 영위하며, 후대에 문화를 남기면서 인류의 존속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문화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인류의 기나긴 문화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문화의 지반에서 우리 존재가 시작되었고, 관계의 소산인 문화 안에서 나의 존재가 형성될 수 있으며, 나의 기여로 문화가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문화 자체가 곧 나 자신이 되는 까닭에 우리 삶의 과제는, 우리 문화를 어떻게 고귀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목표를 갖게 됩니다. 우리 문화의 진선미가 곧 내 존재의 가치가 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토록 윤석열 내란범과 투쟁하는 것이 아닐까요? 비상식적인 군부독재가 민주사회의 문화를 지배하는 것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우리 문화적 존재들은, 우리의 삶과 문화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종교와 문화를 함께 말하곤 합니다. 문화가 왜곡되어 인간의 삶을 억누를 때, 문화라는 그릇에 담긴 종교사상은 문화를 혁신하고, 진선미의 문화를 회복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 또한 인류문화의 소산이니, 종교가 부패한다면, 그래서 종교가 바리새주의에 잠식되어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타율적인 종교가 되었을 때, 종교라는 그릇에 담긴 신앙이 개혁을 단행하는 동력이 된다고도 말합니다인간의 삶을 진선미로 보위하는 문화, 종교, 교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며, 우리는 지금까지 다양하고도 수많은 개혁과 혁신의 역사들을 전해듣고 또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개신교의 근현대 선교역사 속에서 문화적으로 혁신된 신앙의 모습, 한 가지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근현대 선교를 주도했던 주체는 서구교회였습니다. 항해술의 발달과 신대륙의 발견 속에서, 때로 제국주의의 기류 속에서 짐짓 나침반을 잃어버리기도 했던 서구교회의 선교와, 이에 응전한 제3세계 피선교지 교회의 복음 수용의 역사는, 우리에게 신앙의 주체성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개신교는 복음의 이동, 곧 선교의 과정에서 신앙의 주체성, 주체적인 신앙고백의 진정한 의미를 성찰해온, 혁신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피선교지의 낯선 상황들을 만난 에큐메니칼 서구교회는 자신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타자, 곧 피선교지 교회의 반응을 통해 진정한 신앙을 깨달았습니다. 타자를 통해 주체를 깨닫는 신앙을 경험하였습니다. 피선교지 교회 또한 서구교회의 잘못된 선교자세에 저항하면서, 그리고 복음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자신의 오랜 문화적 정서로 진실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주체성을 발양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개신교 근현대 선교 과정에서 성찰한 신앙의 주체성을 언급하면서, 그렇게 혁신된 그리스도교 신앙이 오늘 우리 교회에 어떤 모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지, 이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국악예배와 예향으로 귀결됩니다. 우리 교회에 안착된 국악예배는 개신교 근현대 선교 과정에서 샘솟아 새롭게 문화화 된 주체적인 신앙의 결실입니다. 그리고 예향은 그 주체적인 신앙, 새롭게 갱신해온 그 신앙을 문화적으로 이어나가고 있는 우리 교회의 의지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경계를 넘어가는 것으로 강하게 이해되었습니다. 이것은 부족종교의 한계를 넘어서라는 명령이었고, 지고한 진리와 선을 세계에 전파하라는 의미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고등종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구 근대의 계몽주의 조류는, 경계를 넘어가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에 불을 짚혔습니다. 1800년대 후반에 서구교회의 신앙인들은 신대륙 발견에 호응하며 제3세계 피선교지로 진출하였습니다.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생겨났고, 그들 눈에는 미개하게만 보였던 제3세계 국가에 복음과 문명을 전한다는 열의가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열정은 실로 미지근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전하고 열방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했던 그들의 헌신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의료선교의 보살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냈고, 문서선교로 신학문을 깨우치게 하였으며, 피선교지의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공장을 짓기도 했습니다. 복음 전달의 매체인 말과 글을 배우고 번역하면서 대륙 간 정신적 교류의 실마리를 제공한 공로도 작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순수한 열정은 제국주의 기류 속에서 왜곡되었습니다. 교회와 제국은 제3세계로 진입하는 데 상호간 통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서구교회는 두 갈래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피선교지 교회의 삼자정신 곧 자립, 자치, 자전(스스로 전도하며 공동체를 세울 수 있음)을 인정하고 신뢰하면서 지원하는 에큐메니칼 교회입니다. 다른 하나는, 서구교회를 제3세계 이식하여 확장시키는 사명에 충실한 교회입니다. 한국에서 전자는 일제시대 한국교회를 도우며 독립운동에 기여하게 한 교회였고, 후자는 미국으로 하여금 국내의 자원을 빼돌려 협조함으로써 제국으로부터 교회의 지위를 보장받은 교회였습니다

 

3세계 피선교지 교회는 서구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수용하면서도, 제국주의 기류에 휩쓸려 몰아쳐 오는 서구교회의 선교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피선교지의 신생교회들은 서구의 낯선 문화를 대체하며 반제국주의적인 교회문화 만드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른바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겠다"고 하는 주체적인 신앙의 출현이었습니다. 복음의 참다운 가치인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복음을 전해준 서구교회에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이제 당당히 서구교회와 동등한 관계에서, 전 세계를 잠식하는 제국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연합 공동체를 꿈꾸었습니다.

피선교지 신생교회의 삼자정신을 응원하는 에큐메니칼 진영의 서구교회는, 3세계의 이러한 성장에 환호하면서도, 처음에는 문명이 발달한 서구교회가 제3세계에 문명을 전해준다는 계몽적인 우월의식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습니다. 서구의 우월주의에 신물을 느낀 제3세계 신생교회는 서구교회와의 올바른 관계정립을 위하여 선교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계몽주의적인 선교, 신생교회를 가르치려는 선교, 개종 목적의 선교는 더 이상 그만하라, 더 이상 선교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표명이었습니다.

서구의 에큐메니칼 교회는 자신의 우월주의적인 태도를 반성합니다. 1910년대에 서구교회의 기치는 우리 세대에 전 세계에 복음화를 이루자"는 것이었습니다. 계몽주의의 극치였습니다. 그러나 제3세계 신생교회들과 조우하고 1970년대에 선교 모라토리움" 선언을 들으면서 그들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선교의 진정한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따르는 교회일 뿐이며, 따라서 복음화와 선교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피선교지 신생교회를 통해 완성하신다는 성찰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큐메니칼 대회인 세계교회협의회(WCC)를 구성할 때도 제3세계 신생교회 대의원의 수를 서구교회 대의원과 동수로 하게 하고, 3세계 상황에 우선하는 선교에 함께했습니다.

 

개신교 근현대 선교의 역사는 몇 마디 사례로 단정할 만큼 간단하지 않습니다만, 중요한 의미 중에 하나는 주체적인 신앙을 탐구하며 깨달아온 과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서구교회가 제3세계 상황을 만나면서, 3세계 신생교회가 성장하는 가운데, 서구교회는 제3세계 신생교회를 통해서 계몽주의 선교를 회개하고,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기 전까지 선교의 주체는 교회라고 확신했습니다. 3세계를 서구교회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선교가 완성되고 그들이 비로소 구원을 받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깨닫고나서 서구교회는 하나님이 이미 세상으로, 3세계에서 선교하고 계시고, 그곳에서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우리도 선교한다,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 사상"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선교(missio ecclesiae)"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로의 사상적 전환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에 새로운 빛을 비출 수 있을 만큼 큰, 기념비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을 통해서 서구교회가 주체적인 신앙을 획득했다고 생각합니다. 3세계 신생교회, 그 타자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정립하여, 자신 안에 존재하는 모순을 극복한 주체성이 태동한 것입니다. 이 성찰은 에큐메니칼 선교의 기본 자세가 되었고, 우리는 이같은 주체성을 배우고 늘 기억하면서 우리의 선교를 수행해가야 하겠습니다.

 

서구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수용한 제3세계 신생교회의 성장은 주체적 신앙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3세계 신생교회들이 서구교회를 향하여 선교 모라토리움을 선언할 때 그들이 겪었던 고충은,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에 시달리고 내부적으로는 서구교회에 간섭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체적인 결단은 악한 질서에 저항하는 것, 그래서 본래 천부인권을 당당히 요구하며 획득하는 것입니다. 주체성을 억압하는 외압에 맞서면서 모라토리움, 곧 모든 지원마저 거부하겠다는 신생교회의 선언에는, 주체적 책임감과 악의 질서를 전적으로 거절하는 단호함이 묻어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죄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정의와 평화 안에 거하지 못하여 약속하신 은총을 받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3세계는 제국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강탈당하고 있었습니다. 악의 질서로 인하여 죄에 빠진 형국이었습니다. 신생교회의 성장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종말론적 약속에 힘입어 새로운 존재”(P. Tillich)로 거듭남을 상징했습니다. 악의 질서를 거절하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구원 받은 주체로 나아가겠다는 신생교회의 선언이었습니다. 그것이 선교 모라토리움"이었습니다.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 앞에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구원의 신비에 동참하겠다는 초월적인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주체적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서구교회와 제3세계 신생교회가 보여준 주체적인 신앙의 내용은, 근현대 개신교 선교역사가 가르쳐주는 신앙의 교훈입니다. “서구교회의 선교적 양육을 더 이상 받을 만큼 우리는 어리지 않다, 제국주의 악의 질서를 거절한다했던 제3세계 신생교회의 주체적인 신앙선언. 그리고 타자를 통해 진정한 주체를 깨달아 새로운 사상으로 거듭난 서구교회의 주체적인 신앙. 서구교회와 신생교회를 아우르는 세계교회협의회(WCC)120여년의 에큐메니칼 선교는 상황화에 충실한 집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선교 여정에서 맞이하는 다양한 상황들에 대해 진지하게 경청하고 상황에 맞게 타자와 함께 행동해 왔다는 평가입니다. 에큐메니칼 교회의 상황화 선교의 결실은 바로 주체적인 신앙을 성찰한 것이었습니다.

 

알맹이를 담는 그릇이 있듯이, 주체적인 신앙을 담는 문화양식이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교회가 성찰한 주체적인 신앙은 어떤 그릇, 어떤 문화양식에 담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주일예배로 드리고 있는 국악예배는 그 주체적인 신앙을 담은, 매우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우리의 국악예배는 단순한 기획에 의한, 잉여적 가치를 충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국악예배는 개신교 근현대 선교 과정에서 높이 성찰한 주체적인 신앙"을 기념하는 상징이라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생교회가 새로운 존재로서 주체적인 신앙으로, “우리 우물의 생수를 마시겠다"고 선언할 때, 그 의지를 표명한 매체가 이른바 주체적 토착화(indigenization)”에 의거한 새로운 예배양식이었습니다. 낯설고 강요된 서구문화의 예배양식이 아니라, 자국의 전통과 정서로 예배를 디자인했습니다. 그렇게 주체적 신앙을 표출한 것입니다. 이같이 과감한 시도를 목도한 서구교회는 문화토착화(inculturation)”로 응답하며 “letting go” “speaking out”이라고 화답했습니다. 신생교회가 자신있게 소리치는 것을 그대로 용인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습니다. 서구 그리스도교 정통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왜곡되게 토착화를 단행하면 이단이 생겨날 수 있다는, 어줍잖은 관리자 습성을 버린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가능했던 것은 앞서 말씀드린, “선교는 하나님이 완성하신다. 신생교회가 만난 하나님을 우리는 신뢰한다.”는 하나님의 선교 사상 때문입니다. 신생교회의 선언과 서구교회의 인정, 이것이 에큐메니칼 정신이 되어서,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에큐메니칼 행사 때마다 국악예배와 같은 실험이 독려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 말미에 우리가 고백하며 채택한 생활실천다짐을 낭독합니다. 10개항 중에 세번째 다짐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국악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향린교인 생활실천다짐 3. 우리는 우리의 삶과 숨결이 녹아 있는 우리 가락과 정서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더욱 뜻깊은 예배가 된다고 믿으며, 우리 가락이나 우리 악기를 배우기 위해 힘쓴다.”

우리의 삶과 숨결이 녹아 있는 우리 가락과 정서"를 언급한 것은, 첫째,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개신교 선교의 큰 기류에서 우리 문화양식으로 예배를 표현하는, 곧 우리의 주체적인 신앙을 내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이에 더해 한국교회가 우리 문화를 천대하고 억압해왔던 역사를 회개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자를 존중하는 에큐메니칼 선교 자세가 아닌, 서구교회 문화를 이 땅에 이식하고 피선교지 교회를 지배하기에 급급했던 배타적인 서구교회는 우리네 문화를 존중은커녕 인정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들의 미성숙한 선교를 사대했던, 주체적이지 못한 한국교회 신앙인들은 우리의 가락과 정서를 악마시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의 국악예배에는 그러한 한국교회의 반성이 동반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회개가 새로운 예배문화 창출의 기본이 되기에, 오늘도 우리 국악예배는 소중합니다.

그리고 셋째, 우리 가락과 정서가 과연 우리 삶과 숨결에 녹아져 있는지도 되돌아보게 합니다. 교회와 예배의 지평을 떠나서, 우리 가락과 정서의 소중함을 우리는 얼마나 체득하고 있는지, 우리는 예배 가운데 이것을 얼마나 유의미하게 실현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늘 다짐하고 있듯이, 우리 악기를 배우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을 어떠실지요?

 

지난주 저는 예향 단원들과 함께 예향 30주년 기념 특별예배 준비모임"을 가졌습니다. 1995년 우리 교회가 공식적으로 창단한 예향과 예향의 전신이었던 "에 대해서, 그때의 분위기와 예향의 창립정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난주 담임목사님이 안내해주신 것처럼, 저는 올해 예향 30주년에 일조하는 하늘뜻펴기를 몇차례 준비하고자 합니다. 때때로 주제에 맞춰서 예향과 함께 새롭게 시도할 만한 특별한 예배순서도 기획해보려고 합니다. 마침 제가 민속예배를 공부한 경력이 있어서, 제가 전공한 내용을 교우들과 나누면서 예향 30주년을 기념하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 교회가 국악예배를 채택하고 공예배로 안착시킨 것은 단순하게, 우연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향이 창립되기 전부터 우리 교회에는, 그리스도교 문화에 민족문화를 수용하고 재창조하려는 의지를 가진 청년 교우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1987년이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마당극을 각색하는 등 민속예배를 실험하고 더불어 새로운 예배양식을 논증하기 위해 활발한 학습활동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전국기독교문화 경연대회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기에 출전해서 대상을 수상하고 명동 엘칸토 예술극장에서 공연으로 선보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때는 주로 풍물과 마당극을 소재로 하고, “"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중간에 녹록지 않은 어려움이 있어서 가 해체되는 상황을 맞았으나, 민족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시 모여 1995년 예향을 설립했습니다. 이때는 선율악기의 필요성을 느꼈기에 창단초기에는 예향 단원들이 선율악기를 배우는 데 전념했습니다. 악기를 다룰 줄 알았기에 국악예배를 시도해보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 우리 신앙에 필요한 것이니 해내자는 취지가 예향 창단정신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당시 단원들의 열정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주경야독 하듯 악기를 숙달하는 일과 예배에 민족음악을 접목하기 위한 연구 학습에 열심이었습니다. 단원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예배 반주에 가담하고 악장을 영입하는 등 전문인력이 결합하면서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2003년에 국악찬송가를 발간하고 몇번의 국악예배 컨퍼런스 등의 사업을 통해 지금의 기반을 다져왔습니다.

예향이 창단하고 기반을 다지기까지 당시 단원들의 지대한 의지와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예향이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지와 노력이 지금의 국악예배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예향의 노력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의 목회적 관심과 의지가 뒷받침되었고, 그리고 교우들의 지원과 인내가 있었다고, 그때 교우들의 인내심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국악예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초창기 단원들은 회상합니다.

예배에 우리 민족문화의 정신과 음악을 접목하여 우리네 새로운 예배를 창출하는 것, 이것이 예향의 창립정신이었고, 오늘까지 그 정신은 국악예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악예배, 이것은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겠다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발자취가 우리 공동체에 새겨진, 주체적 신앙의 유산입니다. 신앙의 주체성을 계승하겠다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한국적 결실인 것입니다.

 

신앙의 주체성, 주체적인 신앙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진실하게, 투명하게, 깊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는 힘은 주체성에서 나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 암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전광훈 류의 속임수를 꿰뚫는 시선, 그 패악질을 거절하고 극복할 수 있는 힘도 바로 신앙의 주체성에서 오는 것입니다.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일, 타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에 초대하는 선교를 할 때 우리는 타자에게 진실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진실함 또한 주체적인 신앙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서, 사도행전, 누가복음서의 본문은 주체적인 신앙과 관련하여 선정하였습니다. 이사야서 본문은 주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아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소명 기사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여 새로운 존재가 됨으로써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영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합니다. 새로운 주체가 되게 하는 초월적인 신비체험은 우리를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힘입니다. 더 이상 악의 굴복하는 존재가 아닌, 주님의 은혜의 해를 당당히 선포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목적입니다.

3세계 신생교회가 당당히 선교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사야가 체험했던 주님의 부르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이방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나사렛 예수에게 보내셨던 성령을, 하나님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이방 사람들에게도 보내신 것을 베드로는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놀라움 가운데 그들에게 세례 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부족종교의 범주를 넘지 못했던 유대주의자들에게 야훼 하나님은 할례를 매개로 한, 하나의 권력 카르텔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이스라엘 유대민족에게 우선한다는 선입견이 팽배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총이 이방 사람들에게도 공평하게 내리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더이상 부족종교가 아닌, 보편종교라는 새로운 지평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것임을 베드로는 놀라움 가운데 깨닫게 됩니다.

에큐메니칼 서구교회에서 이 베드로의 놀라움이 공명되지 않았을까요? 놀라움 가운데 하나님의 선교(missiio Dei)”를 성찰하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선교 자세는 우리를 통해서도 이어져야 합니다.

 

 

씨를 뿌려본 농부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그 비유를 바로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입니다. 노동의 원리를 체득한 사람, 그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감각적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들을 귀를 갖추는 것이 요구됩니다. 가난한 사람들, 고난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삶을 살 때, 그렇게 우리의 귀가 갖춰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노동의 경험이 없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종교 권력자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나라의 이야기였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귀 있는 자들의 상황에 맞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씨를 뿌려본 경험을 근거로, 그들의 가진 이해력을 자극하여 주체적인 결단을 끌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방식은 주체를 양육하는 선교였습니다. 일방적인 선교는 예수님의 선교방식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서구교회의 예배양식을 이식하는 선교는, 서구의 예배를 그대로 답습하는 신앙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농부의 씨 뿌린 경험을 존중하며 들을 귀를 말씀한 것과 같이, 우리의 정서와 가락으로 드리는 예배, 그래서 더욱 뜻깊은 예배가 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임을 또한 믿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정례적인 주일 공예배를 국악예배로 드리는 것은 세계교회사적으로 보건대 유일합니다. 한국적 예배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가락의 아름다운 선율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한국적 그리스도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만, 이에 앞서 국악예배는 신앙의 주체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예배를 통해서 주체적인 신앙을 기억하시고, 또 우리가 펼쳐내는 다양한 선교 사역 과정에 신앙의 주체성으로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신앙의 주체로 부르시는 주님의 뜻을 묵상하며 잠시 침묵기도 드립시다.

......

(파송사)

악의 질서로 일그러진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지고 배리된 죄인으로 살지만,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나라의 주체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의 삶과 숨결에서 주체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기도할 때 주 성령께서 언제나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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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4 참된 복음의 시작 ㅣ 한문덕 ㅣ 2024-11-24
2024-11-17 생활 전체를 주님 앞에 ㅣ 한문덕 ㅣ 2024-11-17
2024-11-10 넉넉한 만남 ㅣ 한문덕 ㅣ 2024-11-10
2024-11-03 주님의 법 ㅣ 김지목 ㅣ 2024-11-03
2024-10-27 이야기가 있는 공동체 ㅣ 임승계 ㅣ 2024-10-27
2024-10-20 섬김의 증인 | 유영상 | 2024-10-20
2024-10-13 바늘구멍 통과하기 ㅣ 박희규 ㅣ 2024-10-13 file
2024-10-06 신음하는 피조물을 해방하는 생명의 잔치 ㅣ 김경호 ㅣ 2024-10-06
2024-09-15 주님 보시는 앞에서 ㅣ 김지목 ㅣ2024-09-15
2024-09-08 네 사랑이 너를 구원하였다 ㅣ 장동원 ㅣ2024-09-08 file
2024-09-01 흠이 없는 경건 ㅣ 김지목 ㅣ2024-09-01
2024-08-25 예배를 위한 바울의 권고 ㅣ 김기수 ㅣ 2024-08-25 file
2024-08-18 그리스도인의 지혜 ㅣ 김지목 ㅣ 2024-08-18
2024-08-11 화해와 평화가 살 길이다 ㅣ 한기양 ㅣ 2024-08-11
2024-08-04 진리에 잇닿아 있는 사람들 ㅣ 김기석 ㅣ 2024-08-04
2024-07-28 속 사람 ㅣ 김지목 ㅣ2024-07-28
2024-07-21 깊어지는 신앙 ㅣ 오강남 ㅣ 2024-07-2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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