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3. 24.
근래 들어 뉴스를 검색하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폭력적이고 끔찍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공정과 상식을 앞세우지만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무법, 무도한 세상이다. 현 정권 들어 정치권, 기득권층의 무교양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자본주의 산업사회를 움직이는 심리적 동력으로서 분노와 시기가 이제 거의 한계 상황에 달해 사회 전반에 폭력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단군 이래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한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봉건적·위계적 사회관계가 주는 압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지만,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활개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화가 나 있다. 과연 행복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세상은 다시 한 번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권위와 위계로부터 자유롭더라도 너그럽고 행복한 삶에 대한 동경을 잃어버릴 때 인간은 너무나 쉽게 천박하고 저급해진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 세대의 무책임과 무능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재구성해 주고 세계를 이해하게 해 주는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 주지 못했다. 적어도 우리 부모 세대는 어떤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이 가치 있는지 암묵적으로라도 전해 줄 ‘이야기’가 있었는데 우리 세대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 윗세대는 식민지 시대와 전쟁, 가난을 겪으며 힘겹게 살았지만, 그 속에서 우러나온 정직하고 순진한 삶의 이야기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 어렴풋이나마 자식들에게 각인시켜 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굳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계급적 성격을 분명히 지녔고, 그럼에도 계급 이데올로기에 결코 포획당하지 않으면서 그 세대의 살아 있는 삶을 표현해 내는 특성이 있었다. 어릴 적 나는 어른들이 일제 강점기에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했는지, 그리고 전쟁으로 어떻게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했는지 고생담을 들려줄 때마다 이상하게도 그런 슬픈 이야기들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따뜻하고도 행복한 느낌으로 나를 채워 주는 경험을 했다. 가난하고 고단한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 안에서 풍부하고 윤택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출세나 국가발전에 대한 멋진 이야기가 아니라 신기하게도 그런 소박하고 순진한 이야기들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고, 어른이 되어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세상을 이해하는 내 나름의 방식을 찾아가는 데 가장 원초적인 바탕이 되는 ‘기분’을 형성한 것 같다. 그처럼 우리 윗세대가 우리에게 전해 줄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이 땅과, 땅에 뿌리내린 삶에 우리보다 훨씬 더 밀착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괴롭고 힘들게 살았을망정 대지에 뿌리내린 삶의 강력한 힘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전해져 오는 삶의 지혜, 덕스러운 삶에 대한 이야기들, 이런 것은 전통이라는 말로도 지칭할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서 문화라고 할 수 있으며, 종교는 그 핵심에 있다.
박경미 지음, <장소에 뿌리 내리기: 삶의 기술과 민중의 평화에 관한 에세이>(한티재, 2025. 3. 17.) 217-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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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을까?
오늘 우리는 어떻게 너그럽고 행복한 삶에 대한 비전을 그려가고 있나?
오늘 우리는 무슨 힘으로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지 않으면서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겪어내는가?
- 향린 목회 141일차